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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
Yoon, Sol 윤솔 개인전
ORIGIN · 순리자연 · 順理自然


   자연의 쉼 없는 움직임과 순환 그 자체에 과연 의미와 목적이 있을까. 행위와 현상에 대한 의미 생성과 가치의 부여, 그것은 오로지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박물관에는 고 시대의 도기들이 전시되어있다. 사라졌던 수많은 파편을 맞추어 본형(本形) 그대로를 되돌리는 고난도 작업 과정을 상상해보자. 파편 하나하나의 형태와 질감, 색감 그리고 깨진 경계면의 방향은 모두 도기 본형을 가리키는 기록 새김이라는 시간적 의미를 가진다. 어떤 만물이든 시간의 줄을 타게 되면서 원래 모습을 온전하게 유지하며 영원할 수 없듯, 우리 역시 순리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의 지난 길과 향할 길에 대한 사유, 이는 파편으로부터 새겨진 기록을 통해 우리의 되돌림과 되찾음이라는 행위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오랜 시간 동안 구(球)라고 하는 간결한 입체에 담긴 다양한 은유를 형태로 구현하는 작업에 집중해 온 나는 이 완벽한 정형의 아름다움이 지닌 강력한 힘에 매료되어왔다. 그 힘은 구가 담고 있는 심상(images)의 수렴성과 다의성에 있다. 구는 수렴과 응축의 원점(原點)임과 동시에 발산과 확산의 소용돌이를 품고 있는 고요한 방이다. 가감 없는 자연의 순리 그대로의 모습이다.
 
   나는 구를 조각내어 평정에서 혼돈으로, 탄생에서 소멸로 그리고 다시 탄생이라는 순환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는다. 혼돈은 평정을 향해 가는 필연 과정이며 소멸은 새로운 탄생으로의 시작점이다. 이것이 나의 작업을 작동시키기 위한 전제이자 과정이고 그 결과물이다. 혼돈의 조각을 만들기 위한 선을 구면 위에 그린다. 정치(定置)한 구의 표면에 투영된 선들은 거칠지만 예상치 못한 방향과 동세를 가진 놀라운 조각들로 변환되는데 이는 구가 지닌 기하학적 특성, 즉 본형 그대로의 기록을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미 그것은 단순한 선이 아닌 공간의 조각이며 시간의 파편인 것이다. 흙으로부터 고온 소성된 개체에 다다르기까지 조각을 다듬는 과정은 부단하게 이어진다. 매끈한 조약돌의 표면처럼 오랜 시간 무수히 깎이고 다듬어진 모습을 상상하며 만들어내는 조각들은 의도적으로 시간성이 묻어나게 하는 행위의 산물이다.
 
   작업에서 석고 틀은 콜로이드상 흙 입자가 구의 형태에 맞게 배열되어 물질적 특성이 드러나도록 각인하는 인큐베이터다. 석고 틀에서 만들어진 구를 꺼내놓고 한참을 바라본다. 내 앞에 물질로서 놓인 구는 어떤 의미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 적 꿈을 통해 나만의 이미지들이 선별되어 각인된 듯하다. 그것은 내 가슴을 꽉 조여왔던 풍선이었고, 힘껏 차올려 태양을 가려버린 공이었고, 꿈에서 깨어나 꼭 껴안은 어머니의 품속이었다. 나는 이 모든 둥근 것들을 극복해야만 했고, 가지고자 했고, 안으려 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처음 바라보는 엄마의 눈동자같이 의식 깊숙이 새겨진 동그라미처럼 구는 우리가 담을 수 있는 그 어떤 의미로도 변신할 수 있는 원형적 그릇이다. 내가 구의 본형을 흩트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기, 물질로부터 의미에 이르기 위한 물음과 해방에 있다.
 
   사실 이번 전시에서 구처럼 생긴 형태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부재 안에 존(存)함이 깃들어 있음을 안다. 전시된 작품들은 구에 내재한 소용돌이가 나를 거쳐 투영된 모습이다. 각자 자신만의 투영체로서 작품을 바라보았을 때 느끼는 모든 것. 그 고요한 방 안에 소용돌이를 찾았으면 한다. 소용돌이 속 고요한 방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품을 통해서 우리의 경험과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을 둥근 것들을 꺼내어 마주하고, 바라보고, 스며들기를 바란다.